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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2.04. 금요기도회 - 밀레도에서 9(사도행전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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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31-32절






이제 사도 바울은 점점 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헤어져야 할 순간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부탁과 권면도 더 간절해 질 수 밖에 없었지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하면서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에 들어올 이리들을 주의하고 또 스스로가 이리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심각한 주의를 준 후에 사도 바울은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남대문에 대해서 말로 백 마디 설명하는 것보다는 남대문을 찍은 사진 하나를 보여 주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장로들의 마음 속에 이미 새겨져 있는 그림 하나를 다시 끄집어 내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 사역했던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성도들을 훈계했습니다. 그러기를 삼 년 동안이나 계속 했습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그 모습을 가슴과 머리에 새겨넣으라고 부탁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그것만은 기억해야 한다고 그리고 당신들도 그렇게 교회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성도들을 눈물로 권면하며 가르쳤다는 것과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3년 동안이나 가르쳐야만 했던 내용이 그것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변함 없이 눈물로 대한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아끼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전해야 하는 내용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거짓일 수가 없을 것이고 전해받는 사람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교회와 성도를 바울처럼 돌본다면 그들은 참된 목회자로 정말 성도들을 위해서 꼭 전해주어야 할 절박한 것을 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3년 동안 자신이 그들에게 변함 없이 보여주었던 그 진지하고 간절한 모습을 그들의 기억 속에서 꺼내서 새롭게 각인시켜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문제들은 모두 성도와 교회들의 신앙이 너무 경망스러워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일반적인 문화는 심각한 것, 근본적인 것, 어려운 것, 깊이 있는 것, 진중한 것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기피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볍고 즐겁고 우습고 유쾌한 것이 진리라고 믿고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외면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이런 문화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도들 조차도 심각한 것, 무거운 것, 근본적인 것,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설교는 재미있어야 듣고 자기의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합니다. 재미가 없다하면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집니다. 또 그 내용이 자기와 직접 연관이 없다하면 이내 귀를 닫아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그 내용이 굉장히 심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근본적인 주제에 대한 진리들을 알아가고 또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볼까요? 하나님이 가볍습니까? 이 세상이라는 주제가 가볍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죄의 문제는 어떻고, 또 우리 자신의 존재의 문제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의 영생이나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나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문제가 가볍게 흘러 나오는 웃음만으로, 누구나 기분좋게 듣는 태도만으로 다뤄낼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까?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요. 이런 묵직한 주제들에 대한 단 하나 밖에 없는 진리를 말하는 종교이고 그 진리를 믿을 때 그것만을 신앙이라고 인정해 주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진중하고 묵직한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마 한 번이라도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 보셨다면 제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항상 어둡고 칙칙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에는 그 무엇보다도 가볍고 자유로우며 기쁨이 넘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놀라운 선물은 그가 성경의 무거운 진리를 믿고 제대로 깨달았을 때, 성경의 가르침들을 충분히 깨달아서 그것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참 믿음 안에서는 그런 가벼움과 즐거움이 생겨났다고 해서 절대로 이전의 진지함과 무거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가벼움과 기쁨, 그리고 큰 자유는 계속해서 진지함과 무거움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이런 기독교의 진리와 믿음에 대해서 그저 가볍기만한 태도로 다가가고 있으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출발부터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신앙에 다가갈 수 없는 모양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는 일이 이렇게 된 일차적인 이유가 저와 같은 목사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사도 바울처럼 자기 본분을 지키지 못하고 자꾸 이 세상의 경박함에 자기 삶과 사역을 맞춰갔던 것이 오늘 교회를 이렇게 견딜 수 없이 가볍기만한 곳이 되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진리와 믿음은 결코 가볍기만 하고 즐겁기만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삼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눈물로 훈계해야 했던 그런 것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만큼 진지하고 묵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지함이 없이는, 신앙과 진리를 마음과 생각을 쏟아 진지하게 대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결코 그 중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은 신앙, 참된 신앙으로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진지한 성도들의 교회로 만들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진지하고 진중하게 자기 신앙과 진리를 대하며, 그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자유를 얻어내는, 진짜배기 신앙에 이르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이 ‘경박한’ 신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요? 하나님의 눈에 그리고 누군가의 눈에 그렇게 보이게 되는 것이 싫으시지요? 진중하고 묵직한 신앙으로 가꿔가고 싶으시지요? 그러면 자꾸 가벼워지고 싶어하는, 진지하고 무거운 것을 피하려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자연스러운 경향과 반드시 싸우셔야 합니다. 쉬운 것, 재미있는 것을 향해서 기우는 여러분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경박함과 꼭 싸우셔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셔야 합니다. 싸우시다 보면 그 묵직함 속에 깃털같이 가벼운 자유, 그렇지만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진지함 속에 히히덕 거리는 헛된 웃음이 아니라 참 진리를 아는 넘치는 기쁨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여러분을 거기까지 이끌어 가고 싶습니다. 저는 그게 진짜 기독교 신앙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복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 소원 때문에 목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성도와 교회에게 일차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안전한 것이라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첫번째 것이 없으면 두번째와 세 번째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겠지만, 그렇다고 첫번째 것만 있어도 안됩니다. 영적으로 안전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그 다음에 영적으로 든든히 설 수 있고, 그렇게 든든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의 거룩함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기업은 거룩한 자들에게 주는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것을 하나 하나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믿을 때, 그 복음 안에 머물면서 신앙생활 할 때, 우리 영혼은 비로소 안전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영혼이 안전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오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아무리 많고 그 욕구가 아무리 강해도 절대로 그것 때문에 복음이라는 틀을 떠나면 안됩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만족을 얻으려고 신앙생활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심지어는 복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해서도 안됩니다. 항상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라는 것,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만 높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게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이 안전지대에 머물게 되면 그 다음에 이루어져야 할 일은 바로 우리의 믿음과 존재가 단단하게 서는 일인데요.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32절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디에 위탁한다고 하지요? 주님과 은혜의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까? 말씀이 그들을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성도를 든든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시지요. 하나님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은혜로운 일을 무엇인가를 통해서 하십니다. 무엇을 통해서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확하게는 “은혜로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든든하게 세우십니다. 


제가 세어보니 지금까지 삼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1250번을 넘게 했는데요. 이렇게 설교를 많이 하게 되면서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고, 또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지는 진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삶에서 너무 너무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근래처럼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진리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반복해서 들려주시는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점점 더 재미없어지실지 몰라도 저의 입장에서는 자꾸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교하고 가르치려고 애쓸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든든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영혼은 무엇이 든든하게 세워줄까요? 우리의 믿음은 무엇 위에 견고하게 세워질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런 역할을 하는 다른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영혼과 믿음을 든든하게 세워주는 것은 ‘은혜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 밖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가 있다고 하실 수도 있지만, 실제로 기도가 그런 역할을 하는 이유도 이미 성경에 기도에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약속있는 기도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은혜를 주실 때, 또 은혜로운 말씀을 성도들의 영혼에 들려 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에베소의 장로들과 성도들을 부탁했고 그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도 그 말씀을 붙들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에게는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은혜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만이 능력이 있고 은혜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은혜의 말씀이 그 영혼 안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으면 영적으로 풍성해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든든해 질 수도 없으니까요. 저는 사역을 하면서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은혜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계속해서 말씀의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다른지 말입니다. 두 사람은 우선 그 영혼의 든든함에서 너무나 다릅니다. 말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변의 조건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 어떤 것에도 지나치게 집착하여 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은혜를 전혀 모르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온 세상 예수 혼자 믿는 것 같다가도 내일은 믿는 사람의 증거를 젼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작은 것에도 너무나 쉽게 붙잡혀서 주님께서 주신 성도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마음이 그 근본부터 흔들리는 것도 보게 됩니다. 이런 차이는 오래 믿고 짧게 믿고와 전혀 상관 없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단지 은혜의 말씀을 붙들고 있느냐, 말씀의 은혜 안에 거하고 있느냐 때문에 생겨나는 차이입니다. 은혜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을 든든하게 세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니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며 그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우리 영혼에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평강이 부어지고 우리 영혼이 든든해 지기를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빼고 성도가 성도답게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경박해져 가는 문제도 우리가 말씀에 의탁할 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쉽사리 흔들리는 문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을 붙드는 깊은 은혜를 공급 받을 때 우리 신앙에는 깊이가 생겨날 것이며, 점점 더 든든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든든해진 신앙만이 하나님 원하시는 거룩한 열매를 맺어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며, 그 말씀을 통해 영혼과 신앙을 든든케 하는 은혜를 공급받으며 사는 삶은 지금 여기서 사는 동안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주님 곁에서 살아가게 될 때에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무엇을 누리며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지하고 진중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진지하게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얻는 참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