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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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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이 되어주심에 대하여 상황에서 건져주심만이 보호가 아니다. 심지어 죽더라도 그가 영혼을 지킬 수 있었다면 그는 진실로 보호받은 자이다. 그것은 망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흥한 자, 주님이 가장 강하게 지켜주신 자가 누구인가? 그는 순교자이다. 그는 육신의 생명을 내려놓았지만 영혼은 그 누구보다도 획실히 지킴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한 신정론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의 중요성을 아는 자라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산성되어주심임을 동의할 것이다. 왜 그동안 지켜주심에 대하여 상황과 관계된 일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그게 오히려 그 말씀을 비현실적이라 의심하게 했었다. 주님은 분명히 산성이 되어주실 것이다. 내 영혼의 영원한 산성이. 이제 이것을 신뢰할 것이다. 주님은 망하게 하더라도 영혼이 ..
나는 오늘 하나님과 놀았다, 그런데.... 난 오늘 하나님과 놀았다. 정말 오랜만에... 한 10년쯤 만에 흐드러지게 놀았다. 하나님께서 놀자고 부르셨다. 그 동안 어른인 척 하느라고 힘들었다고 와서 오랜만에 한 번 예전처럼 놀아보자고 ... 난 몰랐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왜 여기까지 와 있는지를 와서야 알게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면서야 알았다. 그 분이 놀러오라고 하셨다는 것을... 한참을 놀았다. 그런데..... “뽀개는(용서하시길...)” 찬양을 부르는데 그렇게 그 분과 흐드러지게 노는데 갑자기 속에서 눈물이 흘렀다. 기쁨이 슬픔이 된 건 아니었는데 정말 슬펐다. 슬펐다기 보다는 서러웠던 모양이다.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뭘 하느라고 정말 뭘 하느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잘 놀았던 나를 잃어버리고 살았..
우리는 애초에 이스라엘이었다 2010 겨울 중등부 수련회에서 김형석 전도사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께 이기는 방법은 그 분께 지는 것이다. 그 분께 지면 그 분은 그 사람에게 져 주신다. 그리고는 그에게 새 이름, 이스라엘을 주신다. 그 분에게 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역설적인 이름.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 그 분께 이긴 자이다. 그 분은 져 주신다. 그리고 "내가 졌다 "고 말씀 하신다. 그 분은 그렇게 져 주시려고 그 싸움을 시작하셨고 그래서 그 싸움은 그 분이 이기심으로써 지셔야 끝이 난다. 내 멋대로 할 때도 그 분은 이기고 계셨다. 단지 나만 몰랐을 뿐이다. 우리는 내 맘대로 될 때 내가 이기고 있다고 여기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만 그 때 주님은 자신의 승리를 향해 또 한걸음을 내딛고 계신다. (주께서 웃으심이여!..
복된 저주, 저주스런 복 하늘을 위해서 가슴아프지 않고, 하늘때문에 배고프지 않고, 하늘때문에 목마르고 애통하지 않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 가장 큰 저주이다. 그런 삶은 우리에게서 하늘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하늘을 바라지 않으면, 하늘을 위해 살지 않으면, 결국 하늘은 우리와 상관없는 곳이 되어버린다. 아니 하늘이 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이 하늘인줄도 모를 것이다. 마치 메시야가 왔는데도 그 분이 메시야인지도 모르는 채 그 메시야를 죽었던 사람들처럼 하늘이 와도 하늘인 줄 모르고 그 하늘을 삶속에서 영원히 몰아내고, 여전히 지옥같은 삶을 고집할 것이다. 하늘은 누구의 것인가? 지금 하늘때문에 가난해 하고, 하늘때문에 울며, 지금 하늘때문에 배고프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 마음을 품고 온유..
설교의 홍수 요즘 성도들은 확실히 설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설교를 할 때마다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낀다. 텔레비젼과 인터넷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예배들 속에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어지는 설교들.... 이론적으로야 설교는, 말씀은 많이 들으면 많이 들을 수록 유익하다. 그러나 그게 진짜 유익할까? 혹시 과유불급의 법칙은 설교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말이다. 나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또한 청중의 한 사람으로 너무 많이 듣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많이들으면, 너무 많이들으면 모든 듣는 행위에 대해서 시큰둥해진다. 들음에 대한 기대가 지속되는 시간이나 들음의 임팩트가 지속되는 시간과 강도도 짧아지고 약해진다. 청각도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기재라면 역시 ..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우리는 찬송한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주의 보혈, 보혈의 능력' 그러나 곧이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십시요. 우리는 무엇이든 구할 수 있고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허락하실 것입니다.'라는 선언을 듣는다. 앞의 찬양에도 아멘이고 뒤의 선언에도 아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어디를 어떻게 더하고 어디를 어떻게 보충해야 두가지는 서로를 어렵게 하지 않을 수있을까? 앞의 찬송은 너무 명확해서 손을 댈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뒤쪽의 선언이 조금 구체화되고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가 제한을 받아야 한다. 원래 '원하는 대로 구하라'라는 말씀 앞에는 명백한 조건이 붙어 있다. 그 조건이란 '너희가 내 안에 ..
성찬식 단상 성찬은 당신을 기념하라 하신 예수님의 당부어린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다. 그 성찬을 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분이시다. 살과 피가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살과 피가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살과 피로 이 땅을 살아가셨고, 또 살과 피를 내어주셨으며, 그 살과 피로 부활하셨다. 영광스러운 살과 피로... 성찬을 행하며 묵상해 본다. 그 분은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살과 피가 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그 살과 피를 내어주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해서 그 살과 피를 가지고 부활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그 분의 참된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살과 피인 우리들을 위해서 살과 피가 되셨고, 그 살과 피를 내어주셨으며, 그 살과 피로 부활하셨다. 그래서... 성..
말만 잘하는 건 안된다. 말만 잘하는 건 안된다. 목사로 일하면서 거듭 거듭 생각하게 되는 진실이다. 목사가 말만 잘 할 때 청중은 진리를 신빙성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만 잘하면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청중에 대한 모독이다. 화자의 삶을 훤히 알고 있는 청중들에게는 말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자신을 잘 모르는 청중들을 현혹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결국 더 큰 모멸감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말만 잘 하면 안된다. 공인의 말, 목사의 말이란 적어도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아니, 최소한 걸으려고 애썼던 길의 연장이어야 하며, 말을 던졌으면 적어도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하는 것이 말하는 자의 책임이다. 말만 잘하면 안된다. 결국 그런 말은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그래서 더욱 멸시하게 되는 의미없..